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소련 국경분쟁 (문단 편집) === 북한에 끼친 영향 === 한편 이 중소국경분쟁의 여파는 [[북한/경제|북한의 경제]]에도 영향을 끼쳤다. 원래 북한은 1960년대 초에 들어서 [[한국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흔히 간과되는 부분이지만, 한국전쟁에서 북한도 굉장히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은 평양과 원산과 신의주 같은 북한의 주요 도시들에 전략폭격을 퍼부어 초토화시켰는데, 평양에 멀쩡한 집이 두 채 밖에 없다는 말을 김일성이 할 만큼 평양은 폐허가 되었을 지경이었다. 나중에는 미 공군 조종사들이 북한을 폭격하는 임무를 맡으러 가기를 꺼렸는데, 이유는 북한을 하도 폭격해대서 더 이상 폭격을 할 건물이나 시설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출처: 폭격/ 김태우 저/ 창비/ 2013년 7월 27일] 경제개발 계획이 잘 풀렸다. 이미 1960년 북한의 1인당 GNP(국민총생산 액수)는 137달러로 남한의 94달러에 비해 1.5배였다. 다른 추계방식으론 북한의 GNP는 325달러로 남한의 3.5배였다. "쌀은 곧 사회주의다."라는 기치 아래 벌인 수리화, 기계화, 전기화, 화학화 등 농촌 4화 운동도 성공을 거두어, 북한은 당시 경작지가 남한보다 적음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량에서는 남한을 훨씬 앞서 있었다. 이토록 경제 상황이 좋자, [[김일성]]은 1962년 10월 23일 [[최고인민회의]] 제3기 제1차 회의에서 "머지않아 모든 인민들이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살게 해 주겠다.]]"라고 큰 소리를 쳤다.[*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187쪽] 그런 이유로 1960년대 초반 박정희는 북한의 이런 경제 성장을 경계하면서, 북한 경제를 따라잡을 것을 국가 목표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저런 북한 경제에 1960년대 중반부터 큰 위기가 닥쳐온다. 바로 1964년부터 중국과 소련이 서로 사회주의 노선 변경 문제로 인해 시비를 벌이면서 국경 분쟁에 돌입했는데, 북한은 기술은 소련에서 식량은 중국에서 얻어오는등 이런식으로 중립 외교를 했다. 그리고 북한과 이웃한 공산주의 진영의 두 강대국인 중국과 소련이 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미국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두 나라가 힘을 합쳐서 도와줄 수 없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군사비를 크게 늘렸다.[* 이외에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도 큰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는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 끼어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한 나라를 편들 수 없다는 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1960년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하던 북한의 국방비가 1967년에는 30.4%로 뛰어올랐다. 그래서 북한은 1966년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을 당초보다 3개년 연장하는 수정조치를 취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